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프로이센 공세 (문단 편집) == 결과 == [[파일:soviets_besige_ww2-apha-110219.jpg]] 쾨니히스베르크 시가지로 진입한 소련군 [[ISU-152]] 자주포 22만 명이 넘는 대병력의 독일 중부집단군이 소련군에 포로로 잡히며 사실상 소멸되었다. 그리고 소련은 역사적으로 중세 13세기 독일계 [[튜튼 기사단]]의 프로이센 점령 이래 독일인들 고유의 영토였던 동프로이센을 해체했는데 이 과정에서 '''[[독일 기사단국]]과 [[프로이센 공국]]의 옛 수도'''이자 '''통일 독일의 발상지'''이며 '''대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요람'''인 고도(古都) 쾨니히스베르크를 완전히 병합하였다.[* 정작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시절부터 수도였던 [[베를린]]이었고, 프로이센 왕국이 된 이후에 쾨니히스베르크의 중요성은 전쟁 시 피난처 정도로 줄어들었다. [[프리드리히 1세(프로이센)|프리드리히 1세]]나 [[빌헬름 1세]]는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대관식을 치르기는 했으나 상징적인 의미 이상은 아니었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같은 경우는 쾨니히스베르크에 가본 적도 없었다.] 즉, 소련이 나치의 군국주의와 전체주의 전통의 근간 발상지까지 완전히 접수해버린 것이다.[* 동프로이센에서 발원한 군국주의적 전통은 물론이거니와 쾨니히스베르크 출신인 [[임마누엘 칸트]]의 철학도 히틀러가 자기 입맛에 맞게 나치즘 사상에 이용했다.] 동프로이센의 해체는 전후 독일의 탈나치화, 탈군국주의화를 꾀하던 서방 연합국들도 동의했던 바인데 이 지역이 독일 제국과 나치 독일 시대까지 이어지는 프로이센 군사 전통의 성지였을 뿐만 아니라 2차 대전의 발발 원인 가운데 하나가 전간기 동프로이센이 독일의 월경지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후 영토 할양 협정에서 동프로이센의 중남부는 소련에 동부 영토를 뺏긴 신생 폴란드에 보상격으로 할양되었고 쾨니히스베르크를 포함한 동프로이센의 북부는 소련에 합병되었다. 이후 새로 소련에 편입된 구 동프로이센 지역은 [[칼리닌그라드]]로 개명되었으며, 소련이 붕괴한 현재는 [[러시아 연방]]의 영토로 남아있다. [[분류:1945년 전투]][[분류:독소전쟁/전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